Worksheets농사에 대한 결심
Total questions: 50
Worksheet time: 2hrs 20mins
아버지가 ‘나’에게 나이를 묻는 의도는 무엇인가?
정수가 대관령에서 농사를 짓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
정수가 학교를 그만두고 농사를 짓겠다고 선언한 이유는 무엇인가?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가? 그 까닭은 무엇인가?
저는빨리 하고 싶어요.한 해라도빨리요. 그런거 빨리 해서 뭘 할 건데?
돈 벌려구요.
공부도 취미가 없고 하니까.
정말 맞아 죽을 각오를하고 나는 그 말을 했다.
그러니제발 저를 대관령으로보내 주세요.
부모님과 크게 갈등한 적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문제로 갈등을 겪었는가?
해 도 지 한 해 동안에 돈이나 곡식을 얼마씩 내고 남에게 빌려서 쓰는 논밭이나 집터를 이르는 말.
나는 죽었으면 죽었지 학교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나중엔 아버지가 이런저런 말로 달래도 그 고집만은 꺾지 않았다. 그러니까 제발 나를 대관령으로 보내 달라고.
방학 전에도 1주일가량 무단결석을 하고, 개학이 되어서도 내가 학교로 나오지 않자 선생님이 집으로 친구들을 보냈다. 학급 실장과 이웃 동네에 살고 있는 용문이었다. 그 두 친구에게도 나는 이제 학교를 다니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 집에 찾아오지 말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 내가 꿈꾸었던 농사와는 전혀 다른 길로 들어선 다음 언젠가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농사의 어떤 점이 좋아 어릴 때부터 농군이 되지 못해 그렇게 애를 썼느냐고.
나는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때 내게는 농사만이 나를 그렇게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게 그때로선 유일한 길이었다.
어른은 나이와 상관없이 일로써 자기 경제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나’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꺾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가 생각하는 ‘아이 같은 어른’과 ‘어른 같은 아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나는 하루라도 빨리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마음대로 화투를 칠 수 있는 어른이 아니라 내 손으로 내 경제를 가진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만약 집에서 장사를 했다면 나도 보고 배운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어린 나이에 장사를 하고 싶어 환장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내가 보
어른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내 손으로 내 경제를 가진 어른이 되고 싶었다.
농사가 좋았기 때문이다.
학교에 다니기 위해서였다.
아버지가 대관령에서 농사를 짓겠다고 했을 때, 어떤 약속을 하라고 했는가?
첫해 농사가 실패하면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
학교 공부는 하지 않더라도 책을 읽어야 한다.
농사를 짓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첫해 농사가 성공하더라도 어떤 조건이 있다?
두 번째 약속을 지켜야 한다.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
농사를 계속해야 한다.
아버지가 농사일을 허락하는 대신에 두 가지 약속을 조건으로 제시한 의도는 무엇일까?
니두 이다음 자식 키워 봐라. 부모가 돼서 이렇게 하기가 쉬운지. 학교 다니기 싫다고 제 손으로 책에 불을 지르긴 했다만, 지금은 그렇다 해도 나중에라도 니가 니 갈 길을 잘 찾아갈 거라는 걸 애비가 믿기 때문에 보내는 게야. 학문이든 뭐든 세상 살며 한두 해 무얼 늦게 시작한다고 해서 마지막서는 자리까지 뒤처지는
교다니기 싫다고 제 손으로 책에 불을 지르긴 했다만, 지금은 그렇다 해도 나중에라도 니가 니 갈 길을 잘 찾아갈 거라는 걸 애비가 믿기 때문에 보내는 게야. 학문이든 뭐든 세상 살며 한두 해 무얼 늦게 시작한다고 해서 마지막서는 자리까지 뒤처지는 것도 아니고. 이 말이 무슨 말인지도 늘 생각하고.
전에 상고로 진학할 때에도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그때는 뜻도 모르고 '믿어 줘서 고맙습니다, 아버지.' 했지만 이번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대관령에 가서도 잠은 늘 석중이 집에서 자고. 이불이니 뭐니 거기 필요한 것 갖다 두고. 해도지니 앞으로 넘겨받으면서 집도 니가 쓸 거라고 얘기해 뒀으니까.
농사 자금은 지금 그럴 돈도 없지만 있다 해도 한꺼번에 다 주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집에 와서 타서 써라. 봄 나서 올라갈 때 얼마간 여윳돈이야 주겠지만.
길고 긴 줄다리기 끝에 일단 그렇게 허락을 받은 것만으로도 금방 어른이 되고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음 날 나는 대관령으로 가 눈에 덮여 아직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내 해도지 땅을 보고 돌아왔다. 차항에 있는 5,000평의 밭과 가시머리(그러니까 지금의 대관령 휴게소에서 구도로를 따라 나오는 길 중간쯤의)에 있는 2,000평의 땅이었다.
가시머리 땅을 둘러보고 횡계로 나올 때 나는 다시 눈 속에.
‘나’가 이번에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차항(리)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에 있는 지명.
가시머리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에 있는 지명.
문학의 기능과 가치
가시머리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에 있는 지명.
감자 농사는 씨앗을 확보하고 난 다음 천천히 준비를 해도 되지만 배추 농사는 배추 모종을 키울 종이 포트부터 미리 준비해야 했다.
신문지를 오려 소주병으로 두 겹 말아 풀칠해 원기둥형의 종이 화분을 만들고, 거기에 거름과 비료를 배합한 흙을 채워 온상 속에 차곡차곡 세워 놓은 다음 그 포트 하나하나마다 배추씨를 뿌리는 것이었다. 나중에 그 토 끼 다 ‘도망가다’의 속된 말.
배추 포기 사이를 30센티미터, 두럭과 두럭 사이를 45센티미터로 계산한다 해도 평당 스물두 포기에서 스물네 포기의 배추가 심어진다. 5,000평의 밭이면 12만 포기의 배추가 심어지고 그러자면 하바리 모종을 골라내는 것까지 계산해 15만 개의 포트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신문지를 좀 사려고요. 얼마나?
가운데를 찢지 않은 신문 한 장으로 열 개의 포트를 만들 수 있으니까 그걸 만드는 데만도 여유분을 포함해 1만 6,000장의 신문이 필요한 것이다.
신문사 지국에서 신문지를 살 때 '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대관령에서 고랭지 배추 농사를 시작한 나는 운 좋게 풍작을 거두어 처음으로 큰돈을 손에 쥐게 된다.
대관령에서 고랭지 배추 농사를 시작한 나는 운 좋게 풍작을 거두어 처음으로 큰돈을 손에 쥐게 된다. 배추 상인들과 직접 흥정하고, 오토바이를 사서 타고 다니는 등 나는 어른처럼 행동하지만, 허전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그해 배추 농사는 지지난해 석중이 아저씨의 일을 도와주러 왔을 때처럼 그만 그만했다. 크게 이익이 난 것도 없었고, 손해를 본 것도 없었다. 감자 농사는 같은 땅에 지난해보다 수확이 다섯 가마니나 더 많았다. 그 수확을 마치고, 제일 처음 한 것이 강릉에 내려와 시내에서부터 경포대까지 최고 속도로 달려 보고 다시 시내로 들어와 오토바이를 팔아 치운 것이었다. 그것으로 나는 다음 해에 펼칠 내 뜻을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그러길 바라서가 아니라 나중에 다시 농사를 짓더라도 어떤 일에는 다 때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난 시간에 대한 두려움처럼 두 번째 여름과 가을 사이에 했던 것이다. 지난 초여름 내 오토바이 뒤에 타고 함께 대관령에 갔던 승태 누나도 나의 그런 생각을 도왔고, 그동안 아버지한테 받은 숙제처럼, 그리고 나중엔 거기에 내가 더 깊이 빠져 한 권 두 권 읽기 시작해 커다란 서가 하나를 채우고 남을 정도에 이른 책들도 나의 그런 생각을 도와주었을 것이다. 형도 제대해 집에 와 있었다. 그러나 그 제
‘나’ 는 왜 오토바이를 팔아 치운 것일까?
기간 동안 내가 했던 것은 어른 노릇이었던 것이 아니라 어른놀이였다는 생각이 자꾸만 내 가슴을 무겁게 한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된다 해도 그 일에 대해 어떤 후회나 미련 같은 것이 남는다면 그때에도 내가 하는 짓은 여전히 어른 노릇이 아니라 어른놀이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같은 나이의 다른 아이들이 하지 못하고 있는 무언가를 내가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같은 나이의 다른 아이들이 다 하고 있는 어떤 것을 나만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뒤늦게야 어떤 후회나 소외감처럼 조금씩 내 가슴에 스며들어 오던 것이었다.
오토바이를 팔았다고 했을 때, 그리고 그 돈을 남아 있는 통장과 함께 고스란히 아버지 앞에 내놓았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해도 지도 내놓고요, 석중이 아저씨가 얻든 다른 사람이 얻든 밭 주인한테도 미리 말해 놓고 내려왔어요, 내년엔 올라오지 않을 거라고요.
그러나 전학은 가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했.
아버지가 ‘나’의 농사를 “노름이고 장난”이라고 한 까닭은 무엇일까?
